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대항마을

정착민의 역사가 스며있는 대항마을.
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장군봉과 마을의 시작을 알린 꼬돌개를 가진 마을.
때묻지 않은 순도 100% 매물도 원시적 삶의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과 역사가 교감하는 마을

역사와 전통

정착, 이주의 역사(정착사, 이주의 계기)

꼬돌개, 초기 정착민들이 정착했다고 전해지는 꼬돌개

“그래 인자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왜 매물돈고 하면 여기 빈 밭에 매물, 매물(메밀) 매물 거 많이 심었다 카잖아. 우리도 많이 심었제? 그게 많다고 매물도라 캤는 기라.” (이규열) “우리 마을은 원래 이름이 한목이여, 한목, 큰(大) 목(項)이라는 뜻인디, 한목의 한자지명이 대항이지. 이 대항 마을이 뒤가 두 개의 큰 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가운데 산등성이에 잘록한 목에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이 대항이라. 대항.” (이규열)

“일차적으로 들어온 사람은 흉년들어가지고 가만 보니깐 확실하지는 않은데 보니깐 내가 추측에 어른들 얘기 들어보고 그러니깐 한 숙종 때 정도 되는 것 같애. 그때 대흉년이 있더라고. 2년인가 3년인가 연거푸 흉년이 들었다고 거기에. 이조시대 숙종 때 이조시대는 기근도 많았고 그때 같으면 400년 채 안 되는 거 같애. 계산해 보니깐. 한 1700년도. 1670년돈가 1700년인가 여하튼 그 정도 되더라고. 그때 인제 나와 가지고 사람들이 기근으로. 저쪽으로 그 패총이 지금도 남아 있거든. 저 꼬돌개라는데 밭에 보면 패밭이라고 그러는데 그 밭을 갔다가 지금도. 그 위쪽으로 보면 쪼그만한 샘이 하나 솟아 나오는데 그 위쪽으로 보면 옛날 사람들이 군불을 때고 하는 흔적이 남아 있었어.” (김정동)

“매물도 지금 논이 남해 다랑이 논 그런 스타일로 논이 상당히 있다고 그쪽에. 그래서 고쪽이 그렇다 보니깐 사람들이 지형적으로도 움푹 파인 형태로 되가지고 양쪽으로 산이 되가 병풍처럼 되어있고 겨울철 되면 따뜻하고 여름철 되면 그 밑에 자갈밭도 있고 이라니깐 꼬돌개 거기서 제일 첨 정착하기가 제일 좋았던 모양이라.” (김정동)

“꼬돌개. 애기 들어봤제? 꼬돌개. 지금도 가면 거기 옛날에 거기서 먹을 게 없어가지고 바다 뭐 홍합 같은 거 먹고 그랬다고 옛날 사람들이” (이규열)

꼬돌개는 초기 정착민이 들어와 산 지역으로 대항마을의 남쪽지역이다. 1810년 경 첫 이주민이 들어와 현재 꼬돌개라고 불리는 지역에 논밭을 일구어 정착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기슭에서 물이 잘 나와 섬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고 심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형을 가지고 있다.1825년, 1826년 두 해에 걸친 흉년과 괴질로 인해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다 죽게 됐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존자 없이 한꺼번에 ‘꼬돌아졌다’해 꼬돌개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 변천사(성씨 촌, 인척 관계, 마을의 옛 모습, 지금의 모습. 독특풍습, 전설)

“옛날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인자 조씨가 먼저. 함양 조씨, 함양 조씨가 많이 살고, 그리고 고성 이씨, 우리가 고성 이가 거든. 그래 조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인제 이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 (이규열)

“대항, 큰 마을이거든, 지금 인구로 따지면 우리가 대항마을이고, 저쪽이 당금마을인데 지금은 인구가 저쪽이 많이 살고 있어. 우리보다 잘 살아서 그래. 젊은 사람들 배를 가지고 들어와서 조업하기 위해서 사는 기고, 학교도 여기가 먼저 있었고. 옛날 여기서 국민학교 났는데, 몇 십 년 지나고 나서 그 교육청에서로 여기는 비탈이고 당금에 저 학교는 평지기 때문에 위치가 저가 좋거든. 위치 좋다고 저쪽으로 넘어간 기라.” (이규열)

“공민중학교도 있었다고, 여기에. 그때가 오래 됐지. 한 사십년 됐나. 그때는 마을이 컸어. 대항공민중학교라고. 남녀 공학이라. 야간 중학굔데. 그기 어떻게 됐냐 하면은 옛날에 대학교 나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마을에서로 초청을 해 갖고 월급을 주고 그래가지고 오래 몇 년이 있었지. 요 뭣이 교육청에서 인가를 받았으면 그냥 그 하지만은 우리 인자 마을에서로 옛날에 글 배우기 위해서로 전문가, 대학교 나온 사람들 인자 초청해 갖고 마을에서 인자 그 공부를 그 선생님이 시킸지.” (고어진)

“그게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아들 공부를시킬라고 엄청시리 노력을 했어. 서지먼당. 카면 서지는 뭔가 하면은 여기 사람들이 서재(서당)를 갖다가 서지라 그랬다고. 니 서지 안가나 이래가지고 서지 안가느냐고. 먼당이란 말은 높은데 언덕 높은데 이 런 뜻이거든. 그라면 그게 뭔고 하면 서재가 있었던 곳. 꼬돌개 못 가서. 신촌마을 지나보면 있어. 그 시대에 그러니깐 우리 조상 한 삼대 째 되는 그런 어른들도 4대 째 되는 그런 어른들도 후학양성에 힘을 썼었어.” (김정동)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 되시는 분 살 때 우리 집에서 일을 봐주는 분이라고 요새 말로 일을 봐주는 분이지만 은 머슴 그런 분이 계신데 이름 김자 재자 수자라. 그래 우리가 아버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제를 지내줬거든. 그 어른이 저쪽 거제도에서 서당 하시는 분을 접장이라 그래 접장. 그분을 거제서 모시고 오는데 풍랑을 만났는거라 가왕도 앞에서 풍랑을 만나가 배가 침몰해버렸어. 거 돌아가셨어. 그래서 우리가 제를 지내 줬다고.” (김정동)

“요새사 젊은 사람들 다 빠져나가고 전부 노인들만 남아가 이 마을을 지키고 있제. 선착장도 보건소고 뭐고 다 당금으로 가 버리고 마을에 들어오는 이가 없어, 요 요기 보면 빈 집이 천지라고. 요 놀러온 사람들이 빈집을 사기는 사는데 1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라. 집을 샀으면 관리도 하고 해야 할 낀데.”

유인도로서의 역사가 채 200년 되지 않은 매물도, 꼬돌개에서 정착한 정착 1세대가 기근으로 굶어죽고 뒤 이어 들어온 그 후손들은 빈 공터를 일구어 밭과 논을 만들었고, 거기에 메밀, 보리, 칡 등 목숨을 연명할 만한 작물을 심어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도 매물도 사람들은 후학 양성에 힘을 썼는데 바로 외지에서 한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모셔와 마을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게 했다. 아이들을 위해 세운 마을 언덕 서당엔 언제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아이들로 북적이던 마을, 점차 그 아이들이 자라서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하나 둘 섬을 떠났고, 이제는 마을엔 더 이상 아이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일상생활

결혼, 제사, 장례 中 결혼, 가마타고 섬으로 들어오던 때를 기억하는 할머니

“내가 시집을 육지 충무(통영), 충무하고 가까운데서, 한산도 하고 서자이라고. 한산도 서자이라고 있거든. 충무하고 가깝다 아이가. 무엇 때문에 이리 왔을꼬, 충무하고 가까운 데를 그것도 섬으로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대마도 아이가 올라가면 대마도땅 일본 땅 있는데 뭣하러 요리 왔을꼬. 아이고 아이고, 인제 시집 오께네. 통통배를 타고 저 저쪽 밑에 저~ 자갈밭에 배를 댔는데 쪼깨난 땟목을 타고 실러 나와서 내 손님들이 실로 나와가지고 자갈에다 풀어 가꼬 족두리 씌고 가마타고 절로 올라왔거든.그래가꼬, 통통배서 보니 집도 산이고 길도 산이고 전부 다 그래.” (박순연)

어유도, 소매물도 한 마을처럼 지냈던 이야기

대항마을에서 바라본 어유도.

“그랬지. 여기 요게가 안옥금이 할매하고, 머시기. 박몽식이 할머니가 어유도 사람. 장 그래가 결혼했는기라. 왔다 갔다 아는 사람인께는 그래가지고 중매를 해가지고 결혼을 하고. 안옥금이 할매도 저 살다가 이리 결혼해가 .여하고 저는 거의 같은 마을 맨처럼 댕깄다. 소매물도 사람들도 이리로 와서 결혼식을 마이 했거든.”

일상 속 특별함. 미용실, 병원, 은행, 맛있는 식당 코스가 정해진 할머니들의 통영 나들이

“시장 보러가도 가지고 못 와서 간장도 젤 작은 거 사고 이제 작은 거 사가지고 쪼매씩 가꼬 댕긴다, 큰 거 너무 무거워서 못 들고 댕긴다, 배 멀미도 그렇고 조금씩 사다 먹지. 어 아침에 여덟시 반에 오는 거, 여덟시 반에 오는 거 타고가면 충무가면 얼추 열한시 되거든, 그래 하면 머리하러 가면 빠마하러 가면 열한시 되가 가서 빠마하러 가먼 얼추 열두시 다된다 아이가, 그래가 이리저리 농협에 저런데 이리저리 갔다오면 머리도 옳게 나오지도 않는 기라, 머리도 시간이 안 맞아가지고. 머리도 잘 나오도 안하고, 점심도 옳게 한 그릇 못 사먹고 쫓아온다 아이가 할매들. 맞다, 농협에저런데 돈 쪼깨 빼가 쓸라 카고 병원에 약이나 사러가고 이라면, 머리 풀고 오기가 바쁘다 그래 오면 배타고 오고 그래 안하나. 어어~날 좋으면 그것도 꼭 날 잡아가꼬 한번씩 가는데, 두 달 만에 석 달 만에 이리 나간다 아이가, 그리 나가는데, 그래 쫓아오고, 먹고 싶은 것도 못 사먹고 쫓아오고 이란다.”

집도 산이고 길도 산이더라는 박순연 할머니의 말처럼 대항마을의 길은 여느 등산로 못지않다. 이 험한 길을 할머니들은 지팡이를 짚기도 하고 허리를 든든히 손으로 받치는 뒷짐을 지기도 하면서 꼬부랑 허리로 열심히 걸어 다니신다.

아침 나절 내내, 밭에서 꼼지락 꼼지락 대며 심어 놓은 방풍도 둘러보고 마늘도 살펴보는 할머니들. 당금마을에 비해서 길이 험해서 외출한번 하기가 힘이 드는데, 통영에서 장을 보고 온 물건들도 들고 오기가 무거워서 매번 갈 때마다 조금만 봐서 오는 게 할머니들의 철칙이다. 그러니 가끔씩 오는 손자 손녀들을 위한 과자나 간식거리는 언감생심, 엄두도 낼 수 없다.

다행히 한 통신회사에서 마을길에 모노레일을 설치해 주어 요즘은 장 봐온 물건들을 그곳에 실어서 옮긴다고 하니 할머니들의 장바구니는 이제는 조금 무거워져도 괜찮을 듯하다.

노동, 경제,교통

생업. 척박한 섬에서의 사람들의 생존 방식

먹는 것에서부터 입는 것까지 사람 손을 거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섬에서의 생활, 자연히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잠이 드는 새벽까지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물질을 하여서 식탁에 올릴 반찬을 올리고, 밭을 쪼아서 자식들 입에 들어갈 곡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 매물도 사람들의 천성적인 부지런함은 그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 삼도 삼아가꼬 삼베도 놓고. 집에서 해가입고 팔지는 않았지. 삼을 삼을라카면 물판을 내가 물판서 삼는다 아니가 물판. 어, 이러 가꼬 물어 뜯어가꼬 내려타가꼬, 그래가꼬 인자 쫄쫄 훑어가꼬 요 물판에 건지 놓고 물판에다가 삼을 싹 민다 아이가. 인제 삼 그거를 가지고 물어뜯는다 아니가. 삼 가닥을 가지고. 삼 짠 거 졸졸 실밥에 이래 쪼개놓은 게 있거든, 그거를 가꼬 인자 바딱 눈을 딱딱 훑어가며 찾아가꼬 그래가꼬 이빨로 가꼬 이래 물어가꼬 메루 탄다 아이가, 두 가닥을 메루 타가꼬 한 가닥을 가따 이어 가지고 그따 여 가꼬 물판서 살살 비빈다 아니가. 그래 해가꼬 베틀을 해야 되지. 그래 해가 말아가 젓어 가지고 베틀에다 매서 베로 짠다 아니가. 그래가지고 옷을 해 입었지.” (이옥남)

“밭에가서? 쪼사가꼬 전에는 영감 시루가 갈았다 아니가 시루 가꼬 머리에 씨가꼬 시루 쪼사 가꼬 갈아가고 밭을 해먹었다 아니가? 밭이 다 산 언덕빼기에 있는데 그 먼데를 돌을 파가지고 이고 지고 이래 되니 골병이 들었다 아니가. 숨구고 파고 그리고 내리고 아이고 골병 다 들었다. 거기서 전부 삐져가꼬(정리해서), 절반 삐져가고 전부 또 끌고 내려온다 아니가. 한 50가마이고, 30가마이고 전부 끌고 내려간다 아니가 아침도 한 숟가락 떠먹고 인제, 밥 한 숟가락 싸가서 거서 점심 먹고 일하고 해가 지면 이제 안 내려오나.” (이옥남)

“그래가지고 인자 그리 돼 있고. 옛날에는 여기서 묵을게 없어가지고 흉년들어서 묵을게 없어가지고 칡도 파가 먹고 밭에 산에 칡, 칡뿌리 파먹고, 쑥도 뜯어 먹고, 이 바다 톳. 톳도 뜯어가지고 인자 삶아가지고 그거 물에 불려서 밥을 해 먹고 그래가지고 또 끼니를 때우고. 톳밥. 지금 옛날 대라면 지금 뭐 살기야 좋지. 옛날에야 뭣이든지 배가 고파갖고. 쑥도 뜯어 먹고. 밭에 보리도 채 익기 전에 뜯어가지고 마 막 비비가꼬 마 밥도 해먹고.” (이규열)

“배우는 게 문제가 아니고 먹고 사는 게 어려웠는기라. 쑥도 뜯어야 되고 바다 톳도 뜯어가 무야 되고, 배가 고파서 고구마 그것도 많이 심어갖고 고구마로 끼니 때우는 것도 많았제. 쌀밥이 귀했어. 그러니께 인자 보통은 그 때는 생일이라든지, 뭐 집안 어른 생일이라든지 아 생일이 들면 쌀 조금 해가지고 그놈의 그 밥 좀 물라고 그 때는 좀 굶고 있다가 생일 때 기다리가 먹고, 고 이고 지고 이래 되니 골병이 들었다 아니가. 숨구고 파고 그리고 내리고 아이고 골병 다 들었다. 거기서 전부 삐져가꼬(정리해서), 절반 삐져가고 전부 또 끌고 내려온다 아니가. 한 50가마이고, 30가마이고 전부 끌고 내려간다 아니가 아침도 한 숟가락 떠먹고 인제, 밥 한 숟가락 싸가서 거서 점심 먹고 일하고 해가 지면 이제 안 내려오나.” (이옥남)

“그래가지고 인자 그리 돼 있고. 옛날에는 여기서 묵을게 없어가지고 흉년들어서 묵을게 없어가지고 칡도 파가 먹고 밭에 산에 칡, 칡뿌리 파먹고, 쑥도 뜯어 먹고, 이 바다 톳. 톳도 뜯어가지고 인자 삶아가지고 그거 물에 불려서 밥을 해 먹고 그래가지고 또 끼니를 때우고. 톳밥. 지금 옛날 대라면 지금 뭐 살기야 좋지. 옛날에야 뭣이든지 배가 고파갖고. 쑥도 뜯어 먹고. 밭에 보리도 채 익기 전에 뜯어가지고 마 막 비비가꼬 마 밥도 해먹고.” (이규열)

“배우는 게 문제가 아니고 먹고 사는 게 어려웠는기라. 쑥도 뜯어야 되고 바다 톳도 뜯어가 무야 되고, 배가 고파서 고구마 그것도 많이 심어갖고 고구마로 끼니 때우는 것도 많았제. 쌀밥이 귀했어. 그러니께 인자 보통은 그 때는 생일이라든지, 뭐 집안 어른 생일이라든지 아 생일이 들면 쌀 조금 해가지고 그놈의 그 밥 좀 물라고 그 때는 좀 굶고 있다가 생일 때 기다리가 먹고, (이규열)

대항마을은 당금마을에 비해서 논과 밭이 많은 편이다. 자연히 농사도 당금마을에 비해 많이 짓는데 거기서 수확한 농작물로는 생계를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농사짓는 기술도 부족했고, 지금처럼 좋은 종자가 없었던 탓에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한다.

쌀 대신, 고구마, 칡, 보리를 주식으로 택했고, 산모들이 먹지 못해 모유가 나지 않으니 쥐를 잡아 약으로 아이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모유를 일찍 뗀 아이들을 위해서는 개구리를 잡아서 고아 죽처럼 먹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 풍족한 먹을거리가 넘치는 지금, 그 당시의 섬에서의 생존 방식을 요즘 사람들은 어쩌면 이해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꿋꿋하게 삶을 꾸려나갔던 매물도 부모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내 자식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다 같은 부모들의 마음일 것이다.

공동체

어촌계, 어촌계에서 바다를 가르는 방식

김정동 대항마을 어촌계장님이 들려주는 매물도 바다를 가르는 방식. 특이한 전설이 내려오는 곳, 독특한 지형의 여, 강정, 재미난 이름이 붙여진 매물도 바다 지도 이야기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러니깐 지형을 다 알고 있거든. 이래가지고 파도 요래 생긴다 하면 여가 이리 발달되고 이기 이제 바다 밑이 발달되고 또 요리 발달되고 그라면 요기다 홈이 있는가 아닌가베 .그라면 육지를 기준해가지고 요 홈을 기준한다 아니면 돌출부위 이거를 기준한다 .이렇게. 쪼개는 거야 이렇게. 그래가꼬 1,2,3,4,5,6 이래 해가지고 제비뽑기를 하는거야. 바다를 가르는 거지.” (김정동)

“바다도 요래 보면 지형 상으로 그게 지형 상으로 보면 항상 그런 게 있어. 왜 그런가 하면 우리도 밭이 있잖아. 곡식이 잘 자라는 양지 바르고 하는 데는 고구마를 심어도 맛있고 잘 자라고 하듯이 미역도 마찬가지라. 요리 푹 파인데 보다는 쫌 튀어나온데가 조류가 좋고. 좋다 보면은 대신 파도는 많이 만나지만은 조류가 좋으니깐 그만큼 먹이거리가 많고 또 활동이 좋으니깐 미역 질이 좋고.”

“그러이 바다 밑에 보면은 참 이런 게 많거든. 전체적으로 큰 돌멩이가 크게 생기면은 요래 생긴 것도 있고 요래 생긴 것도 있거든. 그라면 요걸 또 나눈다고. 잘 되는 데는 한 군데만 줘선 안 된다 이 말이라.”

“우리 머릿속에 해마다 이렇게 구역을 나눠보고 하다보니깐 우리들 머릿속에 바다 지형이 지도가 딱 그려져 있어. 지금 해녀들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이연등 아랫치 이라면 어딘지 다 알지. 이 말도 조상대대로 이렇게 불러놔. 이연등이라고 불러놨기 때문에 그렇고.”

“그러이 지명도 재밌는 게 참 많아. 요 섬 주위로 가보면은. 누구 죽은 강정 강정이라는 게 있거든. 강정이라는데 이게 보통 보면 이제 한자로 옛날에 쓰는 거 같애. 이 강자를 써가지고 정자정자 할 때. 이게 어떤 식 인고 하면 해안선을 이리 쭉 가다보면 쑥 파여 가지고 쑥 들어 간 데가 있는데 요 지점을 강정이라고 그러거던. 그라면 이게 쉽게 말해서 강의 정자라. 우리 요 매가리 강정, 비 오는 강정 이런 강정이란 비오는 강정은 우에서 비가 툭툭툭 비가 떨어지듯이 떨어지니깐 비 오는 강정. 또 도우강정. 도우강정은 요래 되어있는데 요리 배가 다닐 수 있는 기라. 이게 도라고 그러거든. 건널 도자 알제? 도강 할 때. 이기 보면 요기 섬이라. 바위라. 그라면 요리 떠갈 수 있으니께 도라 요게. 이걸 도라 그러거든. 도 강정.”

“또 재밌는게 도강정, 동토영감앵이자리. 동토영감? 이기 우리 백부 밑에 그 작은 아버님 저 별명인데. 요기 유래가 재밌는 기 동토라 카는 건 우리말로 동티라. 잘못 건들면 혼난다는 카는 기라. 조용한 어른인데 이 영감이 누가 잘 못 건들이면 동티나듯이 큰일 난다 이 말이라. 그 동티영감앵이자리라 그라면 앵이 요기 먼고 하면 요기 지방 사투린데 혹돔이라 혹돔. 혹돔. 고기라 고기. 앵이 자린데 이기 거가서 혹돔을 잡을라면은 일반적으로 그거는 토착고기라. 토착고기라서 막 이렇게 담치라던지, 저 패조류 패류 같은거를 이렇게 찧어가지고 뿌려노면은 하루 이틀 이렇게 막 먹이 질을 하는거라. 그러면 이거를 먹을 라고 슬큼슬큼 오는거라. 그라고 옛날에는 이 낚시가 얼매나 했는고 이 낚시가 이거마이 했다고. 바늘이 이마이 했거든.그 크지. 이런 낚신데 여기다가 게를 낀다고 게를.: 게를 요렇게 요렇게. 대여섯 마리를 낀다고. 요래 끼가지고 폭 담가놓고 있어. 담가 놓고 있으면서 숙부되는 어른이 고자리에 앉아서 버티고 있는 거라. 고기 잡으러 가면 앵이 낚으러 가면 이 자리라. 항상 버티고 있으니깐. 그래서 별명이 동티영감앵이자리 되버린 거지. 그러이 요 나이 많은 해녀 하는 분들한테 가가지고 저 동토영감앵이자리 어딥니까 하면 다 안다고.”

“그래서 이기 몇 십년 전부터 쭉 건너오고 영식이 구부러졌는 자리라던지 이런 것도 보면 고기 잡고 이렇게 인제 디미는데 올라가다가 구불러 죽은데야 거기가. 그러이 영식이 영감 구불러 죽은 자리라 거가. 그러니깐 지명이 참 재밌어. 그 또 저기 가면 처녀강정이라고 있어. 딱 이때쯤 됐는가보다. 인제 보면 요즘 원추리 같은 거, 개나리 같은데. 그 인제 그거 캐러 가가지고 처녀가 그때는 먹는 것도 변변찮고 하니깐. 보면 그런 게 자라는 게 햇볕을 그쪽이 동쪽을 쳐다보고 있는 자리라 거가. 햇빛이 항상 뜨면은 그 자리에 비추고 하니깐 원추리 같은 게 잘 크고 하니깐 고거 캐러 갔었는기라. 고거 캐러 가가 발을 헛디뎌가 떨어져 죽었는거야. 그래가 처녀강정이라 카고 금순이 죽은 강정이라카거든. 처녀강정이라 그건.”

매물도 역사 알려면 지명을 알면 된다는 김정동 어촌계장님 말씀처럼 매물도 지명 곳곳엔 옛날 이야기가 숨어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한 처녀가 벼랑 끝에서 나물을 캐러 가 떨어져서 숨진 슬픈 이야기에서부터, 같은 자리에서 매일 낚시하던 마을 영감님을 기억하며 붙인 강정자리까지. 매물도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매물도 바다지도를 꼭 살펴보자!!

음식

매물도의 음식(제사 때 먹던 음식들 헛제사 밥, 군수전) 그리고 예전에 먹던 음식들(밭맬)

매물도 제사상에 올라왔던 매물도 제사음식, 매물도 앞 바다에서 잡아 올린 따근따근한 군수전부터 조개, 홍합을 넣고 끓인 시원한 국물에 온갖 채소를 넣고 밥을 넣어 쓱쓱 말아먹는 매물도 헛 제사밥까지! 매물도 제사음식 열전

매물도 헛 제사밥 “제사 지내고 나서. 나물은 콩나물. 미역 ,무, 호박 넣고 탕국 넣어서 먹는 건데 탕국에는 조개도 넣고 꼬막 살도 넣고, 그렇게 해서 밥 넣어서 먹고 그랬지.” (조정순)

매물도 헛 제사밥

“근데 인제 우리가 제례가 여러 가지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데. 보통 보면 치자 들어가는 음식은 잘 안 쓰고 그런데. 또 요 지방은 그렇지도 안 해. 김치도 김치하고 간장을 해가지고 쓰기도 하고. 또 칼치나 그런 것도 쓰고. 그래서 여기는 가만 보니깐 내 어른들 살아계실 때 즐겨 드시던 음식. 정성껏 만들어서 차려드리는 걸로 많이 변했더라고 보니깐. 지방마다 이게 다 틀리거든. 어느 동네는 가면은 노래미라는 고기가 없으면 안 지내는 데가 있고 낭태라는 고기가 없으면 안 지내는 데 가 있고 지방마다 이게 꼭 그래 되라는 법은 없는 거 같애. 이 지방 사람들은 내 조부, 내 어른들 항상 좋아하시던 거 정성스레 만들어가지고. 그러니깐 군수라 카는 그런 것도 이 지방에서만 잡히는 고기거든.” (김정동)

“음식에 보면은 일반적인 제례 음식상을 보면 자반고기를 해가지고 지내는 곳이 거 의라. 근데 여기는 고기가 어쩐 종류를 쓰면 도적이라고 있어 도적. 우리 그 여기서는 도죽 도죽하는데 그게 표준어가 도적이라. 이거 뭐 산적 도적 카는 거는 근데 그거는 큰 물고기. 참돔. 인제 고급고기를 젤 큰놈을 해가지고 이거를 솥에다 쪄. 굽는게 아니고. 찜을 하지. 찜을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우선 내고 또 그담 건어 배를 갈라가지고 그래가지고 또 상에다가 그걸 올리고. 그것도 고기를 큰 거를 써. 그 담에 자반고기라고 그건 구운 고기지. 찌고 말리고 구운 거. 이 세 가지가 꼭 올라가야 돼지.” (김정동)

“국은 잘 안 끓이고. 여기서는 홍합, 굴. 요즘에 는 뭐 세상이 많이 변하니깐 깐새우도 쓰고 이래 좀 하지만은 옛날에는 그걸 안쓰고 그냥 흔히 굴, 홍합. 탕국을 만들어서. 그래가지고 그게 나물도 만드는데. 보통 아홉 가지나 열한가지 해가지고 탕국을 부어가지고 그래 밥을 먹는다고. 비빔밥. 그런데 다른 지방에서는 그래 보면 개밥이라 그래. 나물을 요서 나는 나물. 옛날엔 고래 다 썼는데 지금은 사. 미역이라 던지 톳나물 같은 시금치 같은 이런 거는 다 여기서 나는 거를 하고. 해초는 미역하고 톳 해서 올리고.” (김정동)

“아~군수도, 군수도 올리고 굴도 있으먼 잘 솎아가꼬 물로 팔팔끼리가 솎아가꼬, 솎는거는 물로 끓이가지고 데친다 그말이라, 그래가 무쳐서 부침가루다 무쳐가꼬 계란에다가 그래가꼬 똘똘 계란 저어가꼬 후라이팬에 꾸워가꼬 제사상에 올리지.” (박순연)

“어렸을 때는, 우리 클 때는 거의 다 비슷비슷했지. 한산도니, 이런 데. 음식이, 콩나물밥, 국밥, 고구마 밥, 옥수수밥, 옥수수죽. 그때는 아예 쌀이 없었고, 제사 때나 명절 때. 한 말 정도 팔아갖고 명절 쇠고. 요즘같이 이 뭐, 쌀로 갖고 밥해 먹고 이런 거 못하고 . 배고플 때 옥수수나 고구마 때우고, 근데 농사 많이 짓는 사람들은 그래도 고구마나 배불리게 먹는데, 농사 없는 사람들은 칡가루 내서 칡 장국 해먹고, 칡 수제비 해서 먹고.” (이응식)

밭맬, 어렸을 때 먹던 아련한 추억의 생선
멸치보다 조금 더 작은 생선으로 가을이면 지금의 선착장 자리 앞으로 밭맬이 떼로 몰려왔다고 한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양동이 하나씩 들고 가서 그 밭맬을 건져서 젓갈도 담고 국도 끓여먹고, 초장에 찍어 회로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귀해서 볼 수 없는 밭맬. 어르신들 추억의 음식으로 다시 먹고 싶은 음식으로 손꼽히는 밭맬, 매물도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밭맬의 매력에 빠져보자.

“밭맬이 멸치과라. 국도 끓여 먹고. 그걸 살짝 말려가지고 또 쪄 먹으면 참 맛있어. 그래가 양념해가 발라 먹으면 참 맛있어.” (김정동)

“우리 어렸을 때도 자갈밭에 밀려와갖고, 본 적 있어. 마을 사람들 바구니 들고 와서 주워가고 우리 뭐, 열아 홉 할 땐가. 그러니께… 한 오십년 전인가. 아주 옛날이고, 사오십년 전이고. 밭맬 젓갈이라고 밭맬, 맬은 맬인데, 납닥해. 맬이. 옛날에 많이 했는데, 멸치 젓갈보다 더 맛있었지. 집어먹는 멸치, 볶아먹는 멸치보다는 크고, 그냥 고추장에 찍어먹는 멸치보단 쪼끔 큰 편이라. 납닥해.” (이응식)

“요게 마이 잡았는데 요즘엔 그게 귀해 가지고 안 잡아. 젓갈도 해 먹고 국도 끓여먹고 회도 해 먹고, 겨울에 납닥하이 요만해 밭맬이 요 있더만은 들와가지고 반찬도 해 먹었는데. 시래기 국 끓여 놓으면 맛있고, 빙어처럼 고마 씻어가고 초장 찍어 먹고, 배 있으면 배 썰어서 넣고 상추 뜯어가 무침회 해 먹으면 맛있어. 새콤달콤하니 맛이 있어. 옛날엔 그래했는데 요즘엔 그게 귀해.” (윤양순)

“밭맬 젓갈. 젓갈도 담고, 그거 잡는 사람들은 이장 집에 잡아서 팔고 그랬거든. 밭맬로 잡아다 충무(통영) 갔다가 팔기도 하고, 밭맬이 멸치보다 잔잔하거든. 잔잔한 게 반들반들하이 그러고, 잔잔한 게 그렇다.”

특산물

미역 한 줄이 매물도 사람들의 목숨 줄, 미역을 잘 자라게 하기 위한 갯 닦기 작업은 필수!

매물도 사람들에게 미역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미역 한 줄이 목숨 줄이라고, 요즘이야 교통이 발달해서 민박 손님도 받고 낚시 손님들도 태워서 밥벌이를 할 수 있지만. 교통이 여의치 않았던 예전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절해고도 남해 바다에 홀로 떠 있던 매물도 사람들에게 미역이란 목구멍에 풀칠 할 수 있고, 자식들 공부를 시킬 수 있게 한 귀중한 존재. 섬에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준 유일무이한 존재에 목숨 줄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예전 미역 도구 설명

“그 틀이라고 있어. 미역이 자라고 있으면은 바다에다 나무를 기다랗게 깔아가지고 이렇게 티자 식으로 만들어가지고 뱅글뱅글 틀어가지고 그래서 틀이라. 틀을 이렇게 해가지고 미역을 따고 그런 기구가 있었어 우리 집에. 요즘엔 해녀들이 낫을 갖고 하지만은 옛날에는 워낙 많으니깐. 뭐 그정도 됐으니까 지천으로 깔렸는 거지. 그게 나무를 깍아가지고 쇠를 달아가지고 티자 식으로 달아가지고 틀게끔. 요레 배배 돌리면 딱 끊어져가 미역이 감겨 올라와. 그게 이름이 틀이라. 틀. 그래노이깐 할매들이 해녀 물질을 못해도 미역을 땄다고.” (김정동)

“그 인제 지금은 해녀들이 따는데 시대적으로 그거는 아주 옛날이고. 그 중간 지점에 우리 어른들이 미역을 딸 때 어떤 식으로 땄는고 하면은. 배를 타고 나무를 사각으로 딱 만들어가지고 밑에다 유리를 깔아가지고 수경이라고 만들었어. 수경. 요런 식 으로. 딱 만들어가지고 거서 들여 다보 는 기라. 그담에 대나무를 가지고 이러게 나무를 가지고 한 2,3미터 되는 걸 가지고 낫을 달아가지고 수경 들여다보고 이렇게 캐내지. 물이 빠지 면은 두 다리 동동 걷고 낫을 갖고 비고. 물이 들었을 때는 수경으로 그러다가 해녀들이 캐고.” (김정동)

갯딱이 작업 방법과 그 이유

“그 미역 생산을 할려면은 공이 많이 들어야 돼. 그냥 되는 게 아니고. 뭐 옛날에는 바닷물이 오염 안 되고 하니깐 포자가 미역이 포자라하거든 씨라 안하고. 차츰차츰 이게 약해지는 거라. 근데 우리 지금 밭농사를 예를들면 옛날에는 벌판에 보면 내가 씨 안 뿌리고 거름 안 줘도 보리 같은 거 쌀 같은 거를 딱딱 따먹고 자생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차츰차츰 인간들이 수확을 할려다 보니깐 이놈의 종자들을 약하게 만들어 놓는거라. 그래가 약을 안주고 돌봐주지 안하고 비료를 안주면 안 크는 거야. 그와 마찬가지로 미역도 생산을 많이 할라고 미역을 포자자체를 약하게 만들어 놓는거라. 그러께 엄마를 약하게 만들어 놓은 게 씨도 약하게 되는 거라. 이거 미역귀라는 게 있는데 이렇게. 미역을 보면 귀다리라 그러는데 여서는 거기서 포자가 나오거든. 이기 보통 포자 나오는 시기가 한 5월 6월 요 정도 되면 노오란 물이 나와. 물 자체가 종자가 미역 포자라 그게. 그거를 포자 채취를 우째 하는고 하면은 미역을 끊어가지고 이런 수조에다가 담궈. 담궈 놓고 이렇게 이런데다가 실 타래를 감아. 감아가지고 자연적으로 실에 가서 포자가 붙게 만들어. 그러면 미역귀에서 노란 물이 나오는데 그게 현미경으로 보면 포자거든. 그럼 활동력이 있어가지고 붙을만한데 붙는 거야. 그러면 실이 이렇게 드문드문 감아 놓은데 가서 붙는 거야. 그러면 거기서부터 커 나가게 되는 거거든. 그기 양식 미역이야 그기. 그래서 양식 미역을 하거든.”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자연산이라 하는 거는 고래 했는데 사람들이 가만 생각해 보니깐 돌에서 붙는 거니깐 이기 옳다 꾀를 낸 거라. 바위가 이래 생긴 거 같으면 나무 작대기를 2미터 3미터 되는 나무작대기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쇠를 딱 만들어가 홈을 이래 만들어가 실을 딱 박히도록 만드는 거야 이렇게. 이래가지고 2,3미터 해가지고 콩 콩 바위에 잡풀을 밧겨 주는 거라. 그러니깐 미역 포자가 잘 붙고 잘 크라고. 잡풀 뽑아 주고 하듯이. 바위를 거의 하얗게 만들어 주고. 그러이 다른 방해를 안 받고 커 나오는 거라.”

목숨 걸고 임했던 갯닦이 작업

“그 작업을 언제 하는 고 하면 11월 중순부터 1월 말 정도 까지 하는 거라 이 작업을. 그러니깐 한 겨울에 하는 작업이지. 그래서 물이 이만큼 오는데 가서 쓱싹쓱싹 이래 하지. 지금은 먹을 게 많고 풍요롭지만 이게 매물도 사람들의 진짜 생명하고 같은거다. 그러이 이걸 해야 되는 거라 이걸. 그러이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 9월 말쯤 정도 되면은 통영 장에 가가 고구마 싣고 가가지고 팔고 쌀을 두가마이 사. 평상시 우리 섬에서는 쌀을 많이 먹을 수 없었거든 보리를 많이 먹었는데 그때 먹을 라고 쌀을 두어 가마니 딱 준비해 놓고 있는거라. 그래가지고 그거 할때는 거따가 사활을 거니깐. 그걸로 살림도 살아야 되고 애들 옷도 사줘야 되고 애들 학교도 보내야 되고 모든 돈은 거서 밖에 안 나오니깐 목숨하고 같았거든. 진짜. 미역 한 올을 엄청 크게 생각하는 거라. 그래서 이 작 업을 하는 거라. 그때부터 이 작업을 겨울에 한겨울에. 그걸 이름을 기세라고 해. 기세. 그게 요새 말로 하면 갯닦이라.”

“그래가 돌을 일일이 다 닦고. 그렇지. 잡풀 붙어 있는 돌들이 밖에서 보면 허옇게 된다고. 그래가지고 미역이 크면 바로 콩나물 같이 이렇게 커. 그라면 이렇게 크면은 큰 놈 있으면 요 딱 짤라가 솎아 내뻐리고. 또 솎아내고. 미역 더 키울라고 그러는 거지. 갯 닦이 할 때는 잘 먹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쌀밥도 해먹고 그래가지고 쌀을 두가마이 팔고 통영 장에 가서 소주도 두 상자 큰 댓병이 두상자. 탁 사다가. 그때 먹을 라고 안 먹어. 왜 그러냐면 겨울에 작업을 하니깐 춥거든.. 옛날에 사발이라 춥고 이라니깐 한 사발 이렇게 부어 주는 거라. 소주를. 소주를 이만큼 물에 잠겨가지고 배를 타고 오면서 하고 있으면 자 추운데 한잔 하고 하니라 하면서 그러면 찬물 마시듯이 꿀꺽꿀꺽 그러면 댓병이 하나가지고 세 사람 돌아버리면 한 병 그냥 비아뿌리.내가 그걸 안한지가 벌써 한 30년 40년 가까이 됐는데 안한지가. 지금도 하는 사람은 있어. 간혹 있어.”

미역 바다를 가르는 방법은 앞에서도 나왔지만, 바닷 속 특이한 지형,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명 등을 중심으로 나누어진다. 통상 니 바다 내 바다라고 불리는 바다의 소유는 미역 바다에 한하며, 미역 바다를 얻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자기 집을 소유하고 3년 이상 살아야 어촌계에서 미역 바다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해녀들과 매물도 주민들은 매년 제비뽑기를 통해서 미역 바다를 나누고 있으며, 미역이 많이 나는 바다를 뽑은 이는 구역을 조금만 주고, 미역이 적게 나는 바다를 뽑은 이는 넓은 구역을 주어서 미역 산출량의 형평성을 맞추고자 한다.

매물도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졌던 쑥, 잎부터 뿌리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중풍 예방에 좋은 방풍나물

“그래가지고 아들 배가 아프면 쑥 뜯어가지고 삶아가지고 물로 먹이고, 어데 손이 베던지 이러면 쑥 끓여 가지고 발라가지고 싸매서 낫고.” (이규열)

“방풍은 할매들이 이거 팔아가지고 용돈 쓰고, 요런 데는 뭐 특히 부업이 없다 아니가. 이거는 나물로 쓰고, 나물무침에, 옛날에는 이거를 많이 안 썼는데 요즘은 세상 따라서 약초에 들어가고 이게 요즘은 쌈밥집이고 식당이고 어디 안 들어가는 데가 없어. 이거 뿌리를 한의원에서 많이 쓴다 그래. 뿌리는 약초에 안 들어가나, 그라고 술도 담고. 술도 인삼 술 매로 뿌리 장만해가지고 뿌리.” (이순악)

춘곤증에 좋은 원추리와 시력 회복에 좋은 구기자, 근육통이 있을 때 잎을 찧어서 파스처럼 붙였다는 천남생이, 뿌리를 잘라서 고구마처럼 삶아서 먹었다는 물구와 나리. 노란 꽃이 예쁜 인동초, 매물도 사람들 나물 비빔밥에 빠지지 않은 머구까지. 쑥, 방풍나물 외에도 매물도의 산길, 당금과 대항을 잇는 고갯길에는 몸에 좋은 약초들이 널려 있다. 나물들이 뿜어내는 향긋하고 쌉쌀한 산 내음이 코끝을 살랑 살랑 스쳐가는 이 계절, 운동화 끈 고쳐 매고 매물도 산길을 탐방해 보는 건 어떨까?

매물도 동백꽃 백배 활용법

3~4월이 되면 매물도 전역에 흐드러지게 피는 동백꽃, 붉디 붉은 꽃잎이 지나가는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붉은 꽃 가득 들어있는 달콤한 꿀은 예로부터 아이들의 간식이자 열매로 짠 기름은 할머니들 헤어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미용 아이템! 매물도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매물도 동백꽃 활용법~

“동백나무는 내가 알고 있기는 기름을 짜가지고. 지금은 요새 단화 같은 게 있으면 뭐시 구두제. 이거 가죽이제. 가죽이면 이제 요새 그걸 하제. 구두약 약을 발라 가지고 광을 내거든. 옛날에는 동백기름을 사가지고 했거든. 구두약을 안 하고. 이거 동백기름을 가지고 신을 닦으면 딴 기름하고 틀리가지고 동백기름이 누기가 있어 누기가. 축축한 그 기 있기 때문에 신이 가죽이 틈이 있어가지고 동백기름으로 닦으면 신이 안 상하고 오래가.”

“이게 머리에 바르면 머릿결이 좀 보드라워 윤기가 나지. 촌에 할머니들도 이런 기름을 찾는 사람들은 찾아. 찾는데 동백나무로 할매들이 올라가서 딸 수 없거든. 따가지고 기름 짤 때는. 껍질 벗겨 가지고 알만 가지고. 알만 가지고 이래가지고 기름을 짜는데 기름이 마이 나온다고. 이렇게 해가지고. 전부다 기름이라 이거. 전부다 기름이라.”

“동백기름을 가지고 어떤 산에 제사 중요한 제사 지낼 때 산에서. 옛날 촌에 서 어떤 소원이 있으면 바위 밑에 큰 절벽 밑에 가가 이 기름을 부어 놓고 . 그 종이를 이래 해가지고 이래 비비가꼬 .심지 만들어가. 그으름 없이 불만 요래 싹 나오는 구나 지금 불을 붙이가지고 하면 불 붙는다. 그러이 중요한 곳에만 불로 가지고 큰 바위 밑에 놓고 이래가지고 참 정성을 들여가 했지.”

생애사

매물도의 바다, 따스하고 넉넉한 엄마의 품과 같은 곳
대항마을 최연소 해녀 그녀가 사는 법. (이금자)

“내가 우리 남편 여기 해군 기지 있을 때 만났거든. 그래가 결혼하고 고향을 떠나서 살았지. 그래서 매물도 떠나서 살고 있는데 한날은 전화를 받았더니 오빠가 돌아가셨데. 친정오빠가 돌아가셨단다. 그래가 그날 바로 밤에 통영으로 이천년도, 이천년도에 돌아가셨어. 오빠가 마흔 아홉에 돌아가시고. 난 그동안 앞만 보고 살았어. 일만 일만했어. 남편 챙겨야지, 애들 챙겨야지 그래 잊고 진짜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오빠야가 갔단 말이야. 충격 때문인지 마음이 확 변하더라고. 아 나도 이러다가 인생살이가 별거 아니구나. 살 의욕 , 일할 의욕, 모든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지는 거라.”

“아버지도 마흔 하나에 돌아가시고 오빠는 마흔 일곱에 돌아가셨지. 이러니깐 막 와르르르 무너져. 내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엄마, 내 엄마 . 내 엄마를 떠나서 너무 불쌍해, 우리 엄마, 내 엄마로써 불쌍해. 같은 여자로서. 혼자 남편 잃고 어린 사식들 셋 하고. 시 어머니, 시 아버지, 그때 그 시절엔 재혼도 안하고 . 같은 여자로써 너무 너무 불쌍한 거야.”

“우리 오빠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서 오빠가 갑자기 돌아가셔 놓으니깐 차라리 고향에 와서 엄마 옆에 살아야겠다. 오빠를 삼일 만에 죽었다고 태워버리는데 매물도 앞바다에 뿌릴 때 나는 물에 빠질까 싶어서 아예 오지도 못했어. 어찌 보면 고향에 다시 들어온다는 것이 참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했지만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 우리 오빠가 태어난 곳, 우리엄마하고 같이 살 수 있는 곳. 내가 매물도 들어오니깐 우리 엄마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

“엄마가 우리 집에, 우리 집이 바닷가하고 구판장 가는 길하고 딱 중간에 집이 있어, 바닷가도 좋고 해녀 물질하러 가기도 가깝고 좋은데, 엄마는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면 다리가 아픈 거라. 그래도 하루에 몇 번씩 와.”

“그 나이에 혼자되고 젊은 나이에 아들까지 앞세운 엄마 불쌍해서 같이 살려고 들어왔는데, 그래도 못 견디겠더라. 너무 지루해서 하는 일이 없으니깐. 그래서 한 일 년쯤 지나니깐 아유~안 되겠더라.미역을 캐고 마 시작한기라 하이고 용돈도 짭짤하게 벌어지고 시간도 잘 가데. 해녀 잠수하면 피곤하니깐 잠도 잘 오고 밥맛도 있고 시간이 잘 가고, 돈도 용돈도 생기고, 그래서 내가 잠수를 안했으면 여기서 못 살았을 거에요.”

“원래 헤엄은 좀 치고 그랬는데 본격적으로 한 거는 한 오년 째 되었죠. 이제는 저 모자도 벗어버리고 마스크도 벗어버리고 같이 해녀 복 입고 같이 시커멓게 탄 얼굴로 몸빼 입고 슬리퍼 신고 같은 이 여기에 눈높이를 맞추고 사니깐 더 정이 들고 내가 오십 살 땐가 들왔으니깐 젊죠. 젊다는 축에 속하죠. 제일 나이 어렸으니깐.”

“그러고 막 좋아지잖아요, 길도 포장이 또 되고, 정화조도 인제 해서 오염도 안 되고 바다. 아주 세련되죠. 못 보던 친구들도 연락도 오고 진짜 좋아요. 행복해요. 여기 들왔다 싶은걸 진짜 잘했다 싶어요. 그때 내가 한 육 개월 정도 그때 그 고비를 못 넘기고 뛰쳐나갔으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그리고 해녀언니들 따라 다니면서 미역 캐고 인자 좀 살살 늘어가지고 지금까지 하는데, 내가 벌어서 여기서 적금도 넣고 .”

“한때 여름에는 민박 좀 받고 봄 되면 좀 있으면 미역 캐거든요. 그래서 미역 두 달 정도 작업을 하거든요. 또 겨울에는 성게도 잡고 심심치 않고 그냥 뭐 부자론 못 살아도 남한테 돈 빌리러 안가고 마음걱정이 없어요. 밖에 세계에서는 나를 유혹하는 것도 많고 유행도 많으니까 마음이 벌렁벌렁하고 따라하고 싶고 그렇지만은 여기는 몸빼 입고 슬리퍼신고 댕기는 할머니들, 신문도 없고 티비 뉴스 안 보면 기름 값이 올랐는지 모르고, 복잡한 세상 알려면 고단하고 그렇잖아요. 눈감고 귀 막고 그렇게 사는 거에요.”

우리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민박 손님들 저녁을 차려주고 뒤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소박한 방 한 칸에 강아지 한 마리와 간단한 세간만 들어앉은 조촐한 살림살이.

이리저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고향에 다시 들어오게 된 연유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갑작스런 오빠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들의 아픔, 그 중에서도 나이든 엄마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저히 홀로 엄마를 둘 수가 없어서 다시 찾은 고향. 다시 찾은 엄마의 품. 자식과 남편을 타지에 두고 홀로 들어와 이웃에 엄마를 모시고, 매일 안부 전하며 얼굴 맞대고 사는 딸은 어느덧 매물도 사람이 다 되었다.

아침이면 동네 할머니들과 수다 떨고, 밭일하고 날이 좋으면 해녀 복 입고 물질하고, 잡아온 물건을 엄마에게 자랑하는 일상. 매물도의 바다와 산은 이렇게 상처 입은 두 모녀를 넉넉하고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80평생, 물질만큼 험난했던 인생 이야기.이상연 할머니

“어이구야 해녀 중에서는 인제 은퇴할 때 됐지. 몇 살이 아이라 인제 나이 많고 내가 힘이 부딪치면 내 자신이 고마 그만두지. 그런데 인제 이게 도둑질 매이로 참 희한하제? 오늘 갔다 오면 내일 안 갈 꺼다 이라고 있다 아이가, 근데 날씨가 좋다 아이가 성아 개발하러 갈래하고 온다 아이라, 그러면 또 마음이 가고 접는 기라 오늘만 할래~가보자 이라면 또 따라 가거든, 또 따라가면 내 용돈은 벌어 온다.”

“이 자연산 굴이 안 떨어진다 안 떨어져, 마 깊은 데는 손 안 대니깐 내려가면 떨어지는데 숨이 가파서로 딸 시간이 없는 기라, 숨이 가파가지고 그럼 인자 어떤 데는 내려간 게 아까워서 함 따보면 이만큼 뚝 떨어지면 재미가나 올라고오, 어떤 데는 안 떨어지가 깊어가 올라 와뿐다 고마, 나 여 깊은데서 따서 뭐하꼬 싶어가지고 또 얕은 데로 가면 얕은 데는 안 떨어지는 기라 고마, 그래 가지고 인자 나는 남 신경 안 쓰고 마 내 혼자서 살살 다니면서 하면 세 자루만 따면 어디야.”

“그래 아직까지 내가 나이 많아도 내가 돈을 벌어가꼬. 우리 손주들 용돈을 주고 이래하지 아직까지 나 아들한테 손을 안 벌리는데 이제는 어려서 할매가 저거들 용돈 같은거 줘 놓으니깐 꾀를 내 가지 고는 할매를 돈을 지가 준다. 명절 때 되면 10만원 주는 손자도 있고 20만원 주는 손자도 있고 그래 해도 내가 그거 받아쓰나 저거 아한테 주고 돈이 헤프다. 이 돈 벌어가지고 적금을 쓰고 돈을 아껴 쓰제이, 이리 하다가도 나가면 애들 보면 또 주고 싶은 기라.”

“이상하게 보면 일 안하나 보면 일 하고 잡다 아이가. 그래한다 그래하는데 이래 하다가 올해 미역까지 해묵고 인자 내년 설 쇠면 80인데 나 힘이 달리면 안 할끼다. 남한테 돈 빌리러 안가고 내가 용돈을 벌어 쓰거든, 하루 가면 아무리 못 벌어도 5~6만원씩 좀 벌면 돈10만원씩 벌어온다 아이가 이러니까 그래 가꼬 내가 벌어 쓰고, 서울에 우리 손주가, 딸 둘이 시집가고 아들 손주 하나가 시험 칠 꺼 라고 시험 공부한다고 하고 있거든 그래 공부한다고 뭐시 용돈도 없는가 싶어서 20만원 봉투에 넣어가꼬 물건 보낼 짝에 안에 넣어 가지고 보냈다.”

“어무이 웬 돈을 이래 많이 보냈소 이라데, 손주 줘라 손주 주고 돼지고기나 좀 사다가 아들이랑 볶아 먹어라 그랬지. 손주들이 할매야 캐샀는데 나가 인제 즈그한테 잘 할끼네. 아파서 몸이 아파 나이 많고 누워가 있으면 누가 좋다고 그러데? 그래가 돈을 좀 모아 가지고 안 되면 요새 시설이 참 좋더라. 시설 나이 많은 사람들 양로원그치 매나 그 할매들, 더 나이 들면 거기 가야지.”

“지나온 세월 보면 참. 나가 17에 거제 대포에서 시집와가 27에 혼자가 됐어. 사라호 태풍에 할아버지가 잘못 되고, 사라호 태풍에 그때 우리가 요기서 집을 지어 살면서 조그마한 배를 했거든. 사람도 실어다가 통영에 가고 마산에 가서 잡은 멸치 갖다가 팔고. 애기 아빠가 해녀들 사업을 했는데 팔월 달에 바당 값 대고 해녀들 계산해 주고 할꺼라고 돈 보따리를 집에 뒀어.”

“열한날 밤에 번개 치고 날이 겁났거든. 나는 해녀들 줄 꺼라고 음식을 마이 했다 아니가 그래 전을 부치고 있는데 밤에 배가 왔는 기라. 우리 시어매도 오고 시아지배들도 오고 시아지배들이 전부 도둑놈이더라 내가 겪어 보니께. 그래 가지고 아침에 날이 훤해오는데 (증략) 애기아빠 요 누 자는데, 형이라 카는 넘이 큰 행님이라 카는게 깨워가고 데리고 갔다 아이고 데리고 경문에 내려가꼬 지 동생 넘을 그 배에다 실어놓고 지는 올라왔거든. 배에 오르자 배 닷이 끊긴기라, 배는 닷이 줄이거든, 닷이 끊기면 하모 죽는 거라.”

“그때 빗방울이 마 이랬거든, 보름날 아침에 비가, 비하고 바람하고 와가 부는데 어디가 그 사람이 살 것이고, 몇 발 못가서 죽었거든 저 서비 끝을 못 넘었다가 그래가지고 그 형이라는 인간이 동생을 돈 보고 죽일라고. 나가 입을 딱 닫고 말 안하거든.”

“그 사연이 참 깊다 이런데, 여기에 과부 여자가 하나 있었는 거라. 여 거제로 시집을 와서 아들 둘 놓고 딸은 딴 남자를 얻어 가꼬 딸 하나놓고 서방이 좀 젊어서 죽었는 갑데 죽고, 조 그래인자 그 유명한 사람이거던 요 요집이 있었는데, 그걸인자 조씨들이가 아~너무 여자를 좋아 하는 기라 너무 여자로, 우리 시아버지도 그렇고, 밑에 첩 안 부린 사람이 없는 기라.”

“그 여자도 우리 그 시숙이 그 여자도 탐을 냈는 기라 탐을 냈는데 동생 넘이 우리집이가 인제 눈치가 좀 알았던 모양이라. 그래 가꼬 내 동생 넘을 직이야 이 여자는 내 차지를 하겠다 그래 가지고 아침에 듣고 내랑은, 그리고 배에 날이 험해가 오는데 섬에 살면서 하루 일기를 모르나, 험해오는데 배에 있는 사람 불러야 되제? 사람 배에다 실어가지고 죽으러 가라는 것 하고 한가지지. 그래 실어놓고 배 딱 올리 버리고 올라가자 닷 딱 끊고 우찌 그래, 그래 죽였다 아니가 어디가 물으면 형제간이 불러내서 죽였다고 안 하나. 이거 자는 거 깨워가지고 둘이같이 내리 가데 나는 정지서 밥한다고 내다 보도 안했다.”

“그래 남편이 죽고 그때는 쌀도 없었어. 보리 이것도 못 얻어 먹어가지고 우리 새끼들 다섯을 나가 한때 굶기고 했었다 친척들이 많아도 나 성격에 굶어도 절대로 굶었다 안하고 행님더러 보리 한 되비 주소 나 이런 성질이 아니거든. 우리 시애미도 여 있어도 그 살짝 보리 한 되비 안 떠다 주더라고. 그래 가주고 우리 아들 저 여 공민중학교 댕길 적에 여름철이 다가오고 동복이 들어가고 하복 입을 때가 됐는데 그거를 내가 옷 한 벌 못 사 입혀 가지고 학교만 갈라 그러면 전부다 하복을 입는데 저만 동복을 입었다 아이가. 엄마 오늘도 이래 입고 갈끼가 하면 고마 오늘만 입고 갔다 오이라. 내일은 나가 하복은 한 벌 사주꾸마. 오늘만 갔다 오이라 이라면 참~걔도 말도 잘 들어 그래가꼬 간다 갔다 오면 또 다음날 되면 또 옷이 없다.”

“엄마 오늘도 이리 가야 되나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나가는데 나가고마 그 밥상 앞에서 우 고마 쓰러지삤는기라. 고마 그 길로 나가 병이 들어가꼬 한데 며칠 만에 일어났다 .그래가꼬 우리 새끼들 밥도 나가 마이 굶기고 그래나가 살았거든 살았는데 그래나가 참 안 좋더라. 그 해녀들 줄 돈도, 미역 판 돈도 전부다 시아지배들이 다 가지고 가고 참 어렵게 살았다.”

“고마 애기 낳다가 우리 큰딸이 죽었다 아이가, 큰딸 죽고 나서 나가 병이 나가주고, 서방 죽은 건 아무것도 아이더라. 이래 가지고 이래 병이 나가지고. 그때는 나 젊어서는 여 할매들이 날 보고 이러더라, 그때는 나 그때는 예사로 들었거든 아이야야 아까운 청춘 다 내삐고 니 살겠나. 새끼들 보고 살겠나 저 무신소리 저런 말을 하는가 싶었어. 그랬는데 그래도 어디 좋은데 있다고 중신해주고 가자 그래도 아가 다섯인데 그 아 다섯 델꼬 어디로 가겠노 차라리 고생을 하지. 내 혼자 있는 게 편치 나가 그런 맘이 없데 고마, 나 자식 욕심이 많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다 내버리고 갈 껀데 자식욕심이 많아 가꼬, 그래서 나 참 이 새끼 다섯 눈에 눈물을 흘리고 어디로 가가 잘 되겠노 싶었지.”

할머니의 물질은 할머니의 인생과 닮아 있다. 휘유하고 숨 한번 들이쉬고 깊고 깊은 어둠의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출렁이는 파도와 숨이 헉하고 나올 만큼 찬 바닷물, 숨을 참고 또 참아야 보이는 바닷 속 물건들. 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은 물건들을 있는 힘껏 힘을 주어 간신히 때어내고 나면 일렁이는 파도를 뚫고 다시 올라와야 한다.

의지 하나 할 것 없는 이 망망대해 속에서 할머니와 할머니의 물질 망은 이리저리 파도에 휩쓸린다. 17살, 아버지를 잃고 거제 대포에서 시집 온 이상연 할머니. 할머니를 둘러싼 세찬 인생의 파도 때문에 할머니와 할머니의 자식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몇날 며칠 이어지는 굶주림과 가난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도 할머니는 자식들을 보듬어, 거두어 어엿한 한 부모로 다 키워냈다. 해녀복을 입고 허리에 차는 납엔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거워지고, 옆구리에 찬 물질 망엔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배고픈 어린 자식들의 마음을 담아 바다로 나섰던 이상연 할머니. 꿋꿋이 세찬 파도를 헤쳐나갔던 할머니의 물질은 지금도 계속 된다.

매물도 정착 4대째. 평생의 터전 대항마을에서 소와 함께 하는 여정. 이규열 이장님

“여기 태어날 때부터 살고 있거든.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 아버지 때부터 나 때, 우리 아들들. 지금 여기 살고 있는데, 4대가 지금 살고 있는데. 옛날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이기 옛날에는 여기 여여 우째 왔는동,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 보면 여 섬에 기향(귀향) 온거메 그리 보이는기라. 왜냐면 이기 조그만 섬에 뭐할라 오겠노. 저 육지서 뭍에서.”

“나가 인제 지금 여 살고 있기 때문에 딴 거는 잘 몰라도 섬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거든. 요쭈 요 가면 우리 마을 넘어가면 꼬돌개라 되가 있어. 꼬돌개. 애기 들어봤제? 꼬돌개. 지금도 가면 거기 옛날에 먹을 게 없어가지고 바다 뭐 홍합 같은 거. 그러니 지금 또 소라 껍질, 오래 돼서 수십 년이 되도 껍질이 있고 껍질이 나온다고 지금. 밭에 있다고 지금.”

“이번에 길을 여 팬다고 팠는데 우리 조그만 할 땐 몰랐는데. 우리 집에 그 안에 뭐시 있노 파 보니께. 그 안에 마 조개껍데기 같은 거 굴 껍데기 같은 거 막 나오고 있더라고. 옛날에는 여기서 묵을게 없어가지고 흉년들어서 묵을게 없어가지고 칡도 파가 먹고.”

“밭에 산에 칡, 칡뿌리 파먹고, 쑥도 뜯어 먹고, 이 바다 톳. 톳 뜯어가지고 인자 삶아가지고 그거 물에 불어서 밥 해 먹고. 옛날 대면 지금 뭐 살기야 좋지. 옛날에야 뭣이든지 배가 고파갖고, 쑥도 뜯어 먹고. 밭에 보리도 채 익기 전에 뜯어가지고 마 막 비비가꼬 마 밥도 해먹고.”

“소는 나가 알고 있기엔 계속 키웠고, 우리 부친 때부터 이때까지 키우고 있지. 계속, 소는 인자 우리 농사 있으니께. 소 아니믄 사람 인력으로 요즘에 조그마한 텃밭 같은 거는 마. 그래 가지고 까니리 가지고요 밭을 텃밭간다 카는데, 우리 밭은. 밭이 저 천 평이 넘거든.”

“천 평이 넘는데, 그러니깐 소 아이면 그 우예 쪼사가지고 할 수 없잖아. 지금도 가보면 소도 옆에 있고. 고구매 줄기. 인자 고매 고구마 인자 그거 말려가지고 잘 놔뒀다가 소 여물주고.”

“저게 지금 한 지금 십몇 년 되지. 거의 20년 다 되 가지. 할맨데 저게 새끼를 잘 낳는 기라. 새끼를 잘 놓는데 소가 요고는 일로 해야 되는데 일을 못 해. 이기 밭에 일하는 거랑 논에 일하는 거는 달라가. 그런데 밭에 일하는 저런데는 힘이 좋아 노이께 힘이 좋아 노으니깐 사람한테 안 되겠는 기라. 우리 아들도 올해 오십 하나가 되는데 앞에서 코 잡고 이키면 사람을 갖다가 코를 가지고 들고 댕긴다 들고 댕겨. 안 되겠는기라. 소가 말을 안 들어.”

“저기 소가 주인을 안다. 알지. 나가면 남 가는 거 하고 천지 차인데. 저저 밭에 보리 뜯어 먹으러 간다. 안 시켜도. 소가 좋다. 부르나 안 부르나 간다. 여 와가 물묵고. 코스가 정해져 있어. 소 저거 참 영리하다 말은 모해도. 갈 시간 되면 나 아침에 가면 나온다고 딱 알고 저기 나가 가면 물이 묵고 싶음 소리 한다고.”

“아까 울었는 게 나 찾아서 운거라. 시간이 되면 낮에 울면 날로 알고 물이 먹고 싶다고 이 말이지. 그래가지고 소가 새끼를 똑같이 낳아도 희한하게 알아 맡아가지고 알아. 아무 젖이나 먹을 껀데 똑 저거엄마를 찾아가 먹는 기라. 눈 안보이거든 첫 번째 놓을 때는. 냄새로 맡고 눈을 꼼짝을 안 한다. 안 하는데 우째 그래 저거 엄마 찾아가는 가. 소가 말은 못 해도 바보가 아니더라고,”

“나, 농사 저기 묵혀서 그렇지 억수로 많다. 밭에 한 자리가 고구마 심는덴데. 지금 천 평이 넘는다. 고구마만. 할매하고 우리 아들, 보건소 소장. 발전소 소장이 도와주고, 손으로 하기 때문에. 고 꽂아서 고마 심으면 되니깐. 천 평 하면 고구마 많이 나오지. 이거 보통은 캘수록 마, 많이 나온다고. 볕에, 이렇게 그냥 할라고 하면, 여기 농협에다 여기 농협에다 수매를 하는데, 이거를 갖다가 농협에서는 빻아 드리가지, 이걸 어떻게 만드냐 하모, 이거를 갈아가지고 전분을 만들어.”

“나가 참 농사도 많이 지어. 하루에 30킬로 이상은 산을 타고 댕기는 거 같다. 산에 가면 나무 냄새도 좋고 풀 냄새도 좋고, 좋다. 바다보다 산이 더 좋다. 요 마을에 돌담들도 옛날부터 마을에서 담 쌓아 놓은 거 그대로 있는 거다. 고대로 있다. 옛날에 논이 많기 때문에 샘에 이런 데는 논둑 같은 이런 데가 암만 최하가 일 년에 열 번은 터진다고. 논둑이 내가 이 개간한 데는 쌓아야 되거든. 그래 쌓다 보니깐 돌담 쌓기에 프로가 됐는 거라. 그래가 저쪽에 보면 집 뒤에 돌도 내가 쌓은 거거든. 내가 쌓은 거고. 우리 집이 아닌데 그 사람들이 인자 나보고 일하는 사람이 있으니께. 돌좀 쌓으소 해가지고 쌓다가. 나가 돌담 안 쌓은 데가 별로 없느니라.”

“길은 이거는 엊그제 닦아 놨지만. 옛날에는 사람만 겨우 다니고. 그런데 옛날에 기 계가 어딨노 순전히 수작업을 했지. 그러이 소 그거이 인자 농사짓기 위해서 소가 있어야 돼. 사람이 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때는 우리보다 키우는 집이 몇이 있었지.나는 옛날부터 우리 어른들이 살 때부터 소가 계속 안 떠났지. 아 그때는 마을에 소 있다고 큰 재산이라고. 그래가지고 우리는 옛날에 수년을 살아 도 농사를 마이 지으께네.”

“나 바다일도 마이 했지. 해녀선도 했는데, 해녀를 내가 인솔 해가지고 제주도에서 인솔해가지고 일 년하고 나면 제주 갔다가 다음해 또 와가지고 일을 하고. 전주 일을 내가 좀 했어. 그 바다를 사가지고 나가 사갖고 내가 물에 못 들어가니깐. 해녀가 물에 시키가지고. 해녀 마진 몇 프로 나 몇 프로 이래가지고.”

“내가 한창 농사 많이 지을 대는 나무 요까지가 밭이거든. 요리 내려가야 되는데 요 밭을 한 자리에다 옥수수를 심었는데 나가 가만이 재보이 팔십 몇 가마니를 재 내렸다고, 팔십 몇 가마니를 짊어지고 져다 날랐지, 논 농사도 많이 지었어. 탈곡기도 아직도 갖고 있고.”

“요기 섬은 분가 시켜주기 위해서. 시내 같으면 사다주지만 이런 대는 집을 지어 가지고 밭도 주고. 그랬거든. 어, 집하고. 소도 마이 있으면 소도 한 마리 주고. 옛날부터 그랬어.”

“내가 여기 태어나가 여기 지금껏 살고 있는데 하마 변화가 오나 하마 이 섬이 좀 변화나 이래 봐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애. 다만 관광객들이 조금 늘어나고 그런 건데. 신촌에 있는 이집도 외지 사람이 놀러 와가지고 사놨거든. 사놨는데 한 번도 오도 안하고. 이것도 샀는데 한 번도 오도 안하고.”

대항마을의 터줏대감, 이규열 이장님. 아침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선다. 소에게 줄 물과 여물을 챙기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규열 이장님. 마을에서 가장 많은 농사를 짓는 이장님에게 소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다.

암컷 두 마리와 올망졸망한 새끼 두 마리. 총 네 마리의 소를 자연에 풀어놓고 방목하며 소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돌본다. 이런 정성을 알기라도 하듯 소들은 할아버지 발소리와 목소리가 멀리서만 들려도 깊은 울음으로 할아버지를 부른다. 매물도 대항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오후의 목가적인 풍경들. 유유자적하며 풀을 뜯는 어미소와 곁에서 놀고 있는 새끼소들. 평화로운 봄날의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면 대항마을 뒷산, 이규열 이장님이 계신 뒷동산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본문 콘텐츠 담당자

담당부서
관광과 관광안내소 055)650-0580, 2570

본문 유틸리티

  • 인쇄
  • 위로

만족도 조사

사용자 만족도 조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통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