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대항마을

남서쪽으로 소매물도, 두 개의 굴비섬, 등여섬, 북동쪽으로 어리섬과 가왕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망망대해 위에 나타나고 섬과 섬 사이에는 물결따라 흐르는 배들이 꿈을 꾸듯 떠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절경이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푸른 바다와 올망졸망한 섬들이요, 들리는 것이라곤 갈매기 울음소리 곁들인 파도소리 뿐인 태고의 정적속에 묻힌 이 고도에 언제부터 인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는지? 통영군사에는 1780년경 생계유지를 위해 육지에서 건너온 김해김씩가 정착, 마을을 개척해 나갔다고 적혀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알 길이 막막하다. 현지에서 확인한 바로는, 1810년경 고성에서 거제를 거쳐 첫 이주민들이 들어와 현재 마을 서쪽 1km지점인 꼬돌개라는 곳에서 논밭을 일구어 정착하게 된 것이 이섬에 사람들이 살게 된 시초라 한다.

꼬돌개는 기슭에서 물이 잘 나오고 현재에도 유일하게 논농사를 짓고 있는데, 이 논들이 당시 첫 정착민들이 개간한 것을 제2차 정착민들이 다시 일구어 지금까지 논농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

제1차 정착민들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심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곳이고 물이 많아 귀한 쌀농사를 지을 수 있을 분 아니라 바닷가에는 자갈밭이 있어 고기잡이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꼬돌개에 첫 이주민이 살다가 흉년과 괴질로 모두 쓰러졌다는 사실은 제2차 정착민들에 의해 확인된 내용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제2차 정착민들이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잡기 위해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첫 정착민들이 살았던 집터며 구들장, 가재도구 등을 비롯 숟가락, 밥그릇, 부엌아궁이에 남아 있는 숯 등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는데, 그 때 집터(지금은 밭이 되어 있음) 주위에는 지금도 대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다.

당시 정착민들은 같은 성씨인 경주김씨로 전해지고 있으며, 한 씨족이 한데 모여 살고 있었던 것 같고 논밭을 일구오 농사를 짓는 한편, 물이나면 갯바위에 무진장한 고동과 전복, 홍합, 굴 그리고 미역을 비롯한 해조류를 채취해 먹었고, 남정네들은 뗏목을 타고 고기도 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그 주거지가 밭으로 되어 버렸으나 근 5백 평의 밭은 그들이 채취해 먹었던 패류껍데기들이 부식된 채 밭 전체가 하얀 빛을 띠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 이 밭을 「회밭」이라 부르고 있는다, 그 때의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꼬돌개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50m 지접엔 오늘날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서재를 지어 후생들의 교육에 힘쓴 것을 행각해 볼 때 첫 정착민들의 의식수준과 교육열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서재(서당)가 있었던 곳을 「서지몬당」이라 부르고 있다.
섬이면 다 그렇듯이 당시로서도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철마다 바다가 반반한 날이면 장사배인 진도선이라 부르는 배가 돛을 달고 이곳까지 건너와 물물교환을 하기도 하고, 그 배를 이용, 육지에 나가 장을 봐 왔다는 것이다. 물물교환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곳 주민들의 잎담배와 미역 등의 수산물과 주민들이 필요로하는 가재도구, 약재 및 생활필수품과 맞바꾸는 상거래였던 것이다.

이 진도선은 정착민들의 본 고향이었던 고성에서 오고 가고 했으며 이 배를 이용함으로써 정착민들은 고성의 일가 친척들과 상면할 수 있었고, 조상의 묘소에 성묘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진도선이 닿는 곳은 지금의 고성 철둑 부근이었다고 하며, 모든 장거리는 고성장에서 봐왔다고 한다. 기구한 운명의 첫 정착민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우거진 수풀을 헤쳐 돌투성이인 야산을 개간하며 서당까지 세워 후학에 힘쓸 정도로 정착의지가 강했고, 험한 파도를 건너 고성까지 상거래를 할 정도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억척스럽게 살아나갔지만, 불행하게도 그 후손들은 지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1825년 을유년과 1826년 병술년 두 해에 걸쳐 밀어닥친 흉년과 괴질로 모두 쓰러져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한꺼번에 꼬돌아졌다하여 (꼬꾸라졌다의 이지방 방언)이 비운의 첫 이주민 정착지였던 그곳을 「꼬돌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꼬돌개의 비극이 있고 난 뒤인 1869년, 제2차 이주민이 입향하게 된다. 2차 이주민들도 고성 사천등지에서 거제도를 거쳐 이주해 왔는데, 이주 시기별로 볼 때 대체로 1차 이주집단과 2차 이주집단으로 나누어 들어오게 된다.

제1차 집단인 주씨, 김씨, 이씨들은 맨 처음 (제1차) 정착민들이 살았던 꼬돌개에서 서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작은꼬돌개에 정착했으며, 4년 후인 1873년 제2차 집단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씨별로 이주해 온 시간적 간격은 있지만, 한 집씩 한 집씩 이어져 들ㄹ어와 오늘날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주민들은 주로 2차 집단의 자손들로서 이 땅을 지키며 살고 있다.

이제 제2차 집단을 입주한 순서대로 살펴보면, 함안조씨, 진양강씨, 고성이씨, 밀양박씨, 창원황씨, 청주한씨, 김해허씨, 경주김씨, 김해김씨, 안악이씨, 영양천씨, 순흥안씨, 은진송씨, 남평문씨, 영일정씨, 김해배씨, 광산김씨 순으로 입향하여 집단마을을 형성해 왔다. 2차 정착민 중 제1집단인 주, 김, 이씨들은 작은 꼬돌개에서 살다가 제2차 집단이 자리잡은 마을에 이사해 들어와 합류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현재 마을 주민 중에는 아무도 없다. 주씨는 이곳에서 살다가 육지로 이주하였고, 경주 김씨는 김삼조라는 사람으로 그 후손들은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전주이씨는 그 선조가 묘가 매물도에 있으며, 후손인 이감포가 거제 쌍근에서 매물도로 살러 들어왔다가 다시 쌍근으로 이주해 갔다 한다.

입향민들은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옛날의 농경사회에서, 무엇보다 농토 마련이 급선무였으므로 지금의 대부분 농경지들은 그 당시 정착민들의 피와 땀으로 개간된 것들이다.

2차 정착민 1세들은 초기엔 대부분 담배를 가꾸었고, 수확한 잎담배나 미역, 김, 파래등의 해조류와 말린 고기 등을 거제나 고성으로 가져가 쌀과 일용품 등을 교환해 와 생활했으며, 흉년이 들어 농사를 망친 해에는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찾아가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섬으로 돌아와 담배 등의 농사를 짓고 갯가에 내려가 개발을 하며 살았고, 차츰 야산을 개간하여 농토를 넓혀 나가면서 고구마, 옥수수, 보리 등의 곡식도 심어 어느 정도 식량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삼밭도 가꾸고 누에도 쳐서 삼베나 명주를 짜서 옷도 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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