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대항마을

정착민의 역사가 스며있는 대항마을.
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장군봉과 마을의 시작을 알린 꼬돌개를 가진 마을. 때묻지 않은 순도 100% 매물도 원시적 삶의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과 역사가 교감하는 마을

정착, 이주의 역사(정착사, 이주의 계기)

이규열 : “그래 인자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왜 매물돈고 하면 여기 빈 밭에 매물, 매물(메밀) 매물 거 많이 심었다 카잖아. 우리도 많이 심었제? 그게 많다고 매물도라 캤는 기라.”

이규열 : “우리 마을은 원래 이름이 한목이여, 한목, 큰(大) 목(項)이라는 뜻인디, 한목의 한자지명이 대항이지. 이 대항 마을이 뒤가 두 개의 큰 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가운데 산등성이에 잘록한 목에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이 대항이라. 대항.”

김정동 : “일차적으로 들어온 사람은 흉년들어가지고 가만 보니깐 확실하지는 않은데 보니깐 내가 추측에 어른들 얘기 들어보고 그러니깐 한 숙종 때 정도 되는 것 같애. 그때 대흉년이 있더라고. 2년인가 3년인가 연거푸 흉년이 들었다고 거기에. 이조시대 숙종 때 이조시대는 기근도 많았고 그때 같으면 400년 채 안 되는 거 같애. 계산해 보니깐. 한 1700년도. 1670년돈가 1700년인가 여하튼 그 정도 되더라고. 그때 인제 나와 가지고 사람들이 기근으로. 저쪽으로 그 패총이 지금도 남아 있거든. 저 꼬돌개라는데 밭에 보면 패밭이라고 그러는데 그 밭을 갔다가 지금도. 그 위쪽으로 보면 쪼그만한 샘이 하나 솟아 나오는데 그 위쪽으로 보면 옛날 사람들이 군불을 때고 하는 흔적이 남아 있었어.”

이규열 : “매물도 지금 논이 남해 다랑이 논 그런 스타일로 논이 상당히 있다고 그쪽에. 그래서 고쪽이 그렇다 보니깐 사람들이 지형적으로도 움푹 파인 형태로 되가지고 양쪽으로 산이 되가 병풍처럼 되어있고 겨울철 되면 따뜻하고 여름철 되면 그 밑에 자갈밭도 있고 이라니깐 꼬돌개 거기서 제일 첨 정착하기가 제일 좋았던 모양이라.”

이규열 : “꼬돌개. 애기 들어봤제? 꼬돌개. 지금도 가면 거기 옛날에 거기서 먹을 게 없어가지고 바다 뭐 홍합 같은 거 먹고 그랬다고 옛날 사람들이”

꼬돌개는 초기 정착민이 들어와 산 지역으로 대항마을의 남쪽지역이다. 1810년 경 첫 이주민이 들어와 현재 꼬돌개라고 불리는 지역에 논밭을 일구어 정착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기슭에서 물이 잘 나와 섬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고 심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형을 가지고 있다.1825년, 1826년 두 해에 걸친 흉년과 괴질로 인해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다 죽게 됐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존자 없이 한꺼번에 ‘꼬돌아졌다’해 꼬돌개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 변천사(성씨 촌, 인척 관계, 마을의 옛 모습, 지금의 모습. 독특풍습, 전설)

이규열 : “옛날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인자 조씨가 먼저. 함양 조씨, 함양 조씨가 많이 살고, 그리고 고성 이씨, 우리가 고성 이가 거든. 그래 조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인제 이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

이규열 : “대항, 큰 마을이거든, 지금 인구로 따지면 우리가 대항마을이고, 저쪽이 당금마을인데 지금은 인구가 저쪽이 많이 살고 있어. 우리보다 잘 살아서 그래. 젊은 사람들 배를 가지고 들어와서 조업하기 위해서 사는 기고, 학교도 여기가 먼저 있었고. 옛날 여기서 국민학교 났는데, 몇 십 년 지나고 나서 그 교육청에서로 여기는 비탈이고 당금에 저 학교는 평지기 때문에 위치가 저가 좋거든. 위치 좋다고 저쪽으로 넘어간 기라.”

고어진 : “공민중학교도 있었다고, 여기에. 그때가 오래 됐지. 한 사십년 됐나. 그때는 마을이 컸어. 대항공민중학교라고. 남녀 공학이라. 야간 중학굔데. 그기 어떻게 됐냐 하면은 옛날에 대학교 나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마을에서로 초청을 해 갖고 월급을 주고 그래가지고 오래 몇 년이 있었지. 요 뭣이 교육청에서 인가를 받았으면 그냥 그 하지만은 우리 인자 마을에서로 옛날에 글 배우기 위해서로 전문가, 대학교 나온 사람들 인자 초청해 갖고 마을에서 인자 그 공부를 그 선생님이 시킸지.”

김정동 : “그게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아들 공부를 시킬라고 엄청시리 노력을 했어. 서지먼당. 카면 서지는 뭔가 하면은 여기 사람들이 서재(서당)를 갖다가 서지라 그랬다고. 니 서지 안가나 이래가지고 서지 안가느냐고. 먼당이란 말은 높은데 언덕 높은데 이 런 뜻이거든. 그라면 그게 뭔고 하면 서재가 있었던 곳. 꼬돌개 못 가서. 신촌마을 지나보면 있어. 그 시대에 그러니깐 우리 조상 한 삼대 째 되는 그런 어른들도 4대 째 되는 그런 어른들도 후학양성에 힘을 썼었어.”

김정동 :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 되시는 분 살 때 우리 집에서 일을 봐주는 분이라고 요새 말로 일을 봐주는 분이지만 은 머슴 그런 분이 계신데 이름 김자 재자 수자라. 그래 우리가 아버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제를 지내줬거든. 그 어른이 저쪽 거제도에서 서당 하시는 분을 접장이라 그래 접장. 그분을 거제서 모시고 오는데 풍랑을 만났는거라 가왕도 앞에서 풍랑을 만나가 배가 침몰해버렸어. 거 돌아가셨어. 그래서 우리가 제를 지내 줬다고.”

“요새사 젊은 사람들 다 빠져나가고 전부 노인들만 남아가 이 마을을 지키고 있제. 선착장도 보건소고 뭐고 다 당금으로 가 버리고 마을에 들어오는 이가 없어, 요 요기 보면 빈 집이 천지라고. 요 놀러온 사람들이 빈집을 사기는 사는데 1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라. 집을 샀으면 관리도 하고 해야 할 낀데.”

유인도로서의 역사가 채 200년 되지 않은 매물도, 꼬돌개에서 정착한 정착 1세대가 기근으로 굶어죽고 뒤 이어 들어온 그 후손들은 빈 공터를 일구어 밭과 논을 만들었고, 거기에 메밀, 보리, 칡 등 목숨을 연명할 만한 작물을 심어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도 매물도 사람들은 후학 양성에 힘을 썼는데 바로 외지에서 한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모셔와 마을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게 했다. 아이들을 위해 세운 마을 언덕 서당엔 언제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아이들로 북적이던 마을, 점차 그 아이들이 자라서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하나 둘 섬을 떠났고, 이제는 마을엔 더 이상 아이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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